IVOLD TALES21 / 28
OLD TALES
붉은색은 붉은색으로
[SCENE START]
이대로라면 우리는 랩쳐에게 이길 수 없겠죠.
랩쳐는 무한하고, 우리는 유한하니까요.
냉정하게 얘기하시네요, 라푼젤.
그래서 큰걸 노릴 수밖에 없어요.
이 상황을 한 번에 뒤집을 만큼, 큰 걸.
그런 게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있겠죠. 아니,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그 일은 말도 안 될 만큼 힘들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테죠.
그걸, 우리가 해내야 해요.
갓데스와, 인류가.
승산은요? 승산은 있나요?
없어도 있게 만들어야죠.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니까요.
그러니 레드 슈즈.
절대 포기하지 마요.
저는 먼저 한 발 앞서갈게요.
꼭 따라와요.
저는 인류의 희망이 될게요.
그러니 레드 슈즈도, 반드시 그렇게 해줘요.
갈게요. 나중에 꼭 봐요 우리.
···잘 가요. 라푼젤. 행운을 빌게요.
··· ···.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 ···.
그냥 랩쳐와 같은 편이 되면 되는 것 아닌가?
침식의 시작은 니케를 잠깐 동안 마비시키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 작동 방식이 이상했어요.
신경계를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바디를 건드리는 것도 아니었죠.
그럼 어떻게 마비시킬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죠.
그거 아시나요? 모든 니케의 뇌에는 NIMPH라는 것이 있다는 걸.
뇌에 정보를 주입하고, 뇌의 정보를 백업하는 것이죠.
초창기의 침식은, 이 NIMPH에 강제 침입해 [몸을 움직이지 마라]는 명령을 내리는 거였어요.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중요한 건 NIMPH를 건든다는 것이죠.
저는 여기에서 미래를 봤어요.
인류가 이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지지 않을 수 있는 미래를.
간단해요.
같은 편이 되면 되는 거예요.
저한테 NIMPH를 건드리는 기술은 없어서, 침식을 조사해 봤어요.
놀라운 게 뭔지 알아요? 침식의 코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건 계시라고 확신했죠.
침식에 간단한 명령을 입력해 니케에게 주입해 봤어요.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세상에, 입력된 명령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너무 신기했어요.
그래서 제 인격 데이터를 침식에 심어서, 랩쳐의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게] 서포트하는 역할로 만들어봤어요.
이것도 대성공이었어요.
침식에 걸린 니케는 랩쳐에게 유리한 행동만 반복했어요.
환호성을 질렀어요. 이거라면, 이거라면 우리 인류는 랩쳐와 공존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랩쳐는 적이죠. 쓰러뜨려야 할 적.
하지만, 이 개념 자체를 [랩쳐는 아군이다]라고 지정한다면.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는 거죠.
진정한 의미의 화합을 이뤄낼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어요.
제 인격을 심은 개량형 침식은 한계가 너무 명확했어요.
얼마가지 못했죠.
NIMPH에게 공격당해 죽거나, 뇌를 물리적으로 망가뜨려버렸으니까요.
인격 데이터가 우수하지 못해 다채로운 행동도 하지 못했어요.
제 기술로는 이걸 더 좋게 만들 수 없었죠,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서.
저는 개량한 침식을 심은 랩쳐들을
다시 돌려보냈어요.
랩쳐를 믿은 거죠.
단기간에 놀라울 정도의 진화를 이뤄낸 랩쳐라면, 내가 개량한 침식을.
더욱더 완벽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랩쳐는 제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죠.
제가 살짝 손을 본 침식이 랩쳐들을 거쳐 개량되어 제 손에 들어온 순간, 저는 마치 세상을 얻은 듯했어요.
이제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랩쳐 고유의 기술이 되었지만, 너무나 완벽해진 상태였어요.
그게, 당신을 만든 거죠.
아나키오르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결과물로 말이죠.
저는 이걸 제가 보낸 평화협정에 대한 랩쳐의 대답이라고 생각해요.
[같이 살아가자]는.
당신은요, 아나키오르. 랩쳐와 인류의 평화를 상징할 존재예요.
그리고 완벽한 존재예요.
가장 아름다운 존재예요.
침식 상태일 때는 짐승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면,
지금은 절대자와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져요.
더, 더 알려줘요. 당신에 대해 더 알려줘요.
지금은 어떤가요? 아직도 랩쳐를 위해 살고 싶나요?
니케를 보면 어떤가요? 예전과 차이가 있나요?
잠은 오나요? 맛은 느낄 수 있나요? 랩쳐들이 공격하던가요? 이물감은 없나요?
인간을 죽이고 싶나요? 살리고 싶나요? 목소리는 아직 들리나요? 숨은 얼마나 참을 수 있나요?
알려줘요. 알려줘요 아나키오르. 당신의 모든 것을 알려줘요. 알려줘요 저한테.
궁금한 게 있어.
아아. 질문도 좋죠. 뭔데요?
나한테 침식을 집어넣은 게 너야?
예. 마지막 정비 때 넣었죠.
왜 나야?
당신이 가장 완벽한 니케였으니까요.
랩쳐들이 개량하고 진화시킨 침식과 완벽한 당신이 합쳐진 결과물은.
볼 것도 없이 더욱 완벽한 것이 될 거라 확신했으니까요.
그걸 랩쳐도 알아본 거죠. 당신을 전능하게 개조했으니까요.
저, 랩쳐, 에이브가 합작하여 만든 최고의 걸작.
아아··· 이렇게까지···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요? 신성모독이에요···!
다른 애들한테도 했어?
아뇨. 아직이요.
당신이라는 완성품을 확인하기 전에, 귀중한 분들을 소모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언제부터 랩쳐와 [공존]할 생각이었어?
오래됐어요. 인간일 때부터죠.
페어리 테일 모델에 지원한 이유는?
제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서죠.
그러기 위해선 힘을 가지고, 높이 올라갔어야 했어요.
V.T.C.의 일등 사제이자 우수 연구원이 하는 말보다, 포스트 갓데스가 하는 말이 훨씬 더 영향력이 있을 테니까요.
모든 니케를 침식에 걸리게 하겠다는 얘기야?
물론이죠.
그런 생각이 용케 안 들켰네.
그럼요. 제가 이단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어요.
인지하고 있으면, 피해 가는 건 쉬운 일이죠.
뇌스캔을 하자는 말에 좀 놀랐지만, 생각보다 별 것 아닌 기술이었어요.
저는요, 아나키오르.
운명을 느껴요.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이 상황이 과연 우연일까요? 운명이에요!
그러니 저를 이끌어줘요. 아니, 모두를 이끌어줘요.
헬레틱으로의 길을. 화합으로의 길을.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부디 질문해 주세요.
내가 널 살려둘 이유가 있을까?
제가 당신을 도울게요.
이제 저희는 시작할 수 있어요. 랩쳐와의 [화합의 길]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제가 해내고 말 거예요.
당신은 그저 상징으로 있어주면 돼요.
다른 것들은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아나키오르. 저와 함께
푸슝.
유리 구두에서 뻗어 나온 빛이 레드 슈즈의 코어를 꿰뚫었다.
레드 슈즈는 힘없이 늘어졌다.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신데렐라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싸 쥔 채
소리 없이 오열했다.
···!
··· ···!!
덜컹 덜컹.
!!
신데렐라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레드 슈즈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째서··· 분명 코어를···.
우득! 우드득!
레드 슈즈의 양다리가 가동 범위를 넘어선 각도로 꺾인다.
그리고 신데렐라를 향해 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돌진한다.
콰아아앙-!!
유리 구두를 두드린 다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
본체가 죽어도 움직이는 건가···!
레드 슈즈가 실이 끊어진 인형 같은 모습으로 도약한다.
아아아-!!
유리 구두가 빛을 내뿜는다.
길게 뻗은 광선은 마치 잘 벼려진 검처럼 움직여
레드 슈즈의 양다리를 떨어뜨렸다.
쿵-!
레드 슈즈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레드 슈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두 개의 다리는.
목표를 잃은 듯 온갖 곳을 헤매다가
어둠 속으로 춤추듯 사라졌다.
하아···! 하아···!
아··· 아아···.
아직 숨통이···!
아아아아···.
나도··· 헬레틱으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생명이 빠져나가듯 레드 슈즈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그리고 레드 슈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 ···.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나는!
우리들은···! 그렇게 비참하게···!
윽···! 으으윽···!
아아아아!!
신데··· 렐라···.
!!
···[레드 슈즈!!]
···죽은··· 거야?
뭐야··· 이거···.
뭐, 뭐냐고 이거.
신데렐라는 떨리는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엉망이 된 실내.
다리를 잃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있는 레드 슈즈.
그 옆에 서 있는 자신.
공포와 경악을 숨기지 않는 [동료]들의 얼굴.
네가··· 한 거야?
아니··· 야.
신데렐라!
아, 아니야. 내가 아니야.
아니. 내가··· 한 건 맞는데···.
레드 슈즈가 나한테 침식을···.
침식, 침식을 만들었다고 했어, 레드 슈즈가.
그걸 나한테···.
···뭐라고?
그레텔.
유리 구두는 단단하니까 산성으로 갈게.
좋아, 그레텔.
저 헬레틱을 죽이자, 헨젤.
아니야···! 나는 헬레틱이 아니야! 아나키오르가 아니야!
나는 신데렐라야!
헨젤이 물어볼게.
레드 슈즈가 침식을 만들어서, 너한테 집어넣었다고?
마, 맞아. 정말이야. 내가 다 설명할 수 있···!
그걸 지금 헨젤 보고 믿으라는 거야?
레드 슈즈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으아!
··· ···.
레드 슈즈가··· 그럴 리가 없다고···?
··· ···.
그럼 나는?
··· ···.
··· ···.
나는. 내가 레드 슈즈를 죽인 건 그럴 수 있는 거야?
왜,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봐주는 거야?
왜 그랬냐고, 무슨 일이냐고 왜 안 물어봐주는 거야?
나 돌아왔다고. 다, 다 나았단 말이야.
그런데 왜 내 말은 안 믿어줘?
왜 아무도.
좀 전에 나 다시 만났을 때.
왜 아무도 나한테 괜찮냐고 안 물어봐줬어···?
응?
··· ···.
··· ···.
··· ···.
···너희가 보기에, 나는 뭘로 보여?
침묵이 흘렀다.
···그래. 잘 알았어.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 날 만나러 와 줘서.
너무 고맙다고 생각했었어.
아니었네.
너흰 그냥 괴물 구경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어.
괴물 사냥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신데렐라가 부유한다.
신데렐라!
따라오지 마.
죽일 거야.
신데렐라는 사라졌다.
엉망이 된 실내에서 서 있던 넷은.
침묵한 채 신데렐라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SCEN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