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라푼젤04 / 05
라푼젤
기억의 증명
[SCENE START]
저를 포함한 극소수의 분들은 다른 분들과 뇌의 구조가 달라요.
저의 기억은 새로운 것이 생겨나면, 그만큼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이 사라져요.
그리고 그 기억에는 총량이 있어요.
기억의 총량은 뇌가 노화될수록 줄어들죠.
아시겠지만 저희 순례자 중 일부는 1차 랩쳐 침공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이에요.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만큼 뇌도 노화되었죠.
노화된 뇌에 계속해서 새로운 기억이 주입되고.
쌓인 기억들이 뇌의 총량을 뛰어넘을 때.
과부하를 막기 위해 자체적으로 뇌의 정보가 변화되는, 이른바 사고 전환이 일어나게 돼요.
선택지
보통의 자매님들은 그렇죠.
하지만 저는 달라요.
아마 NIMPH에 이상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선택지
아뇨.
저는 사고 전환을 겪지 않았어요.
뇌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 일부만 남겨놓고 기억을 다 지우고 있거든요.
그래서 가장 최근의 기억은 1년 전의 것들뿐.
내일이 되면, 1년 전 오늘의 기억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좀 전 자매님의 무덤을 지금 만들어줘야 해요.
기회가 있을 때, 기억하고 있을 때 하지 않으면 언제 기억을 잃어버릴지 모르거든요.
선택지
후후. 예. 고마워요 형제님.
··· ···.
형제님은 참 신기한 분이시네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져요.
아니지. 그리움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헉.
설마 형제님, 1년 전쯤에 저와 만난 적이 있는 건가요?
선택지
···아니에요.
형제님은 분명 저와 1년 전에 만났을 거예요.
제가 1년 뒤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마구잡이로 저를···! 오직 형제님만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버려서···!
제, 제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억하게끔 만들어버리신 거군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런 그리움을 느낄 리가 없어요···!
어찌···! 그렇게도 짐승 같은···!
하악 하악···!
선택지
선택지
예.
그러니까 저는 그런 거죠.
가장 과거와, 가장 최근의 기억만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 사이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그 사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죠. 시간은 흘러가니까.
선택지
음··· 별로 재미없으실걸요?
선택지
···알겠어요.
말 그대로 평화로웠던 어느 날.
수많은 랩쳐가 하늘에서 내려왔어요. 정체불명의, 의사소통 또한 불가능한 미지의 존재들이었죠.
랩쳐들은 오직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행동했어요.
문명을 부수고, 사람들을 죽였어요.
그 당시 인류 최고의 군사력은 랩쳐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그저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기만 했죠.
그러길 수 년. 세계 각지에서 [적합자]를 찾기 위한 움직임이 생겨났어요.
랩쳐와 맞서 싸울, 인류 최후의 희망 니케가 될 수 있는 적합자를.
저를 포함한 수 명이 적합자로 판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들은 니케로 다시 태어났어요.
그리고 우린 싸웠어요.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랩쳐들과.
우린 [갓데스] 스쿼드라 불렸어요. 후후, 조금 장난 같은 이름이죠?
선택지
저와 스노우 화이트, 홍련, 도로시, 레드 후드.
···릴리스가 있었죠.
즐거웠던 것 같아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었고.
인류를 위해 싸운다는 사명감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음. 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즐거웠던 것 같아요.
선택지
릴리스가 우리의 리더였죠. 맏언니이기도 했고.
시종일관 무서운 표정으로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해 줬어요.
무엇보다 엄청 강했죠.
그 싸우기 좋아하는 홍련조차 릴리스에겐 한 수 접고 들어갔을 정도니까요.
스노우 화이트는··· 언니 언니 하면서 따라다녔고.
선택지
후후. 예. 지금 모습으로는 상상도 못 하시겠죠?
선택지
그게 기억의 묘미죠.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뭔가를 바라볼 수 있게 돼요.
그리고 지휘관도 있었어요.
선택지
예. 아마 최초의 지휘관일 테니까, 형제님의 아득한 선배겠네요.
그 사람은···. 신기한 사람이었어요.
어쩔 땐 상냥했고, 어쩔 땐 박력 넘쳤고.
어쩔 땐 장난스러웠고, 어쩔 땐 한없이 진지했고.
철없는 아이 같을 때도, 든든한 어른 같을 때도 있었죠.
괴짜 같은 면이 있었던 반면,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를 사람으로.
동료로 대해주었어요.
··· ···.
어머나. 얘기하고 보니 제가 아는 어딘가의 형제님과 너무 비슷한데요?
선택지
좋은 사람이었죠. 너무나.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마 그 사람을···.
선택지
선택지
방주로 무사히 피난했다는 것까지만 알아요.
그 후로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쯤···.
··· ···.
선택지
예?
선택지
선택지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사실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최근 5년 정도는 무리 없이 기억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할 만큼 소중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때.
그곳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흔적이라서예요.
제가 기억해야 해요.
라푼젤이, 스노우 화이트가, 홍련이, 도로시가, 레드 후드가, 릴리스가, 지휘관이.
그때 그곳에 있었다고.
제 뇌의 구조가 다른 분들과 다른 이유 역시.
아마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증명하기 위해.
선택지
밤이 늦었네요.
불침번은 저에게 맡기고 주무세요.
작은 인기척이 느껴진다.
눈을 살짝 떠볼까 싶었지만.
들려오는 작은 울음소리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SCENE END]